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시인 윤동주

ptsilvia 2024. 12. 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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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의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시를 통해서 말이다.

 

 


윤동주는 1917년, 만주 룽징시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명동학교에서 성장하며 민족의식을 키웠고, 어린 시절부터 시 쓰기에 몰두했다. 이미 그때부터 글 속에서 깊은 사색과 슬픔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의 시 중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서시>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 첫 구절만으로도 그의 마음속 깊은 순수함과 결의가 느껴진다. 당시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저항이고, 희망이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걸었다. 대학 시절,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한편으론 조국의 고통을 안고 깊은 성찰을 담은 시를 써내려갔다. <별 헤는 밤>, <참회록> 같은 작품들이 바로 이 시기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런 글들이 당시 일제의 눈에는 위험하게 보였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윤동주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교토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며 더욱 깊은 사유와 성장을 이뤄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조국 사랑과 민족의식은 그를 끝내 위험한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윤동주는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과 약물 실험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견뎠지만, 결국 1945년,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일제의 폭압을 상징하는 또 다른 비극이었다.

 

윤동주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그의 시다. 그가 남긴 시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사후 1948년에 출간되었고, 시대를 넘어 읽히며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단순히 문학적 가치를 넘어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의 시는 한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윤동주의 삶과 시는 그의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그가 꿈꿨던 자유로운 세상,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시는 그날을 꿈꾸게 했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그를 시인으로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로도 기억한다.

지금도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고난 속에서도 맑고 순수한 시선을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일까. 그가 바랐던 부끄럼 없는 삶, 별 헤는 밤에 품었던 꿈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게 된다.

 

윤동주의 삶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시와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꺾이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그가 바라본 하늘과 바람, 그리고 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윤동주가 꿈꾸던 세상은 아마도 모두가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별 헤는 밤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시는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