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의사는 189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식이 깊었던 그는, 일제강점기하에서 조국의 현실에 큰 분노를 느끼며 독립운동에 뜻을 품게 됩니다. 그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지역 사회에서 신망을 받던 집안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을 길러갔습니다.
1.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운동 입문
1910년대 중반, 박재혁 의사는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학교는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군사 훈련을 통해 무장 투쟁 역량을 키우던 곳으로, 박재혁 역시 이곳에서 군사적인 지식과 무술을 배우며 독립운동가로서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그는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2. 의열단 합류와 의열 투쟁
박재혁 의사는 1919년, 의열단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의열단은 김원봉이 주도해 창설한 비밀 조직으로, 일본 주요 기관과 고위 관리들을 표적으로 삼는 의열투쟁을 지향했습니다. 박재혁은 당시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일본 경찰서와 같은 일제의 상징적인 기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의열단의 주요 거사 중 하나인 부산경찰서 투탄 사건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3.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박재혁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입니다. 그는 일본이 식민 통치를 위한 핵심 기관으로 삼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본 경찰 조직에 큰 충격을 주고자 했습니다. 폭탄을 투척해 부산경찰서장 다나카를 포함한 일본 경찰을 공격했으나, 사건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4. 체포와 고문, 그리고 순국
박재혁은 체포된 후 부산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에게 의열단 조직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했으나, 박재혁은 끝까지 비밀을 지키며 동지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잔혹한 고문을 견디다 끝내 단식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버텨내며 스스로의 결의를 지킨 박재혁 의사는 1921년 3월 11일, 단식으로 인해 결국 순국했습니다.
5. 박재혁의 유산과 의의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는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그가 보여준 희생과 투쟁 정신은 독립운동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의거는 이후 의열단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후 일본 경찰과 통치 기관들은 박재혁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공격에 대해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현재 부산에는 그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박재혁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의 헌신과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박재혁 의사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