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본명: 나두영, 羅斗永) 선생은 대종교를 창시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1863년 12월 2일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마을(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철의 생애는 그 자체로 혼란했던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초기 생애와 관료 시절
나철은 학문을 닦아 29세에 문과 병과에 급제하며 승정원 가주서와 승문원 권지부정자 등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관료로 활동하며 나라를 위한 뜻을 품었으나,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관직에 머물러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호남 지역의 의기 있는 인물들과 함께 **1904년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 구국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을사조약과 을사오적 암살 계획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나철은 이를 막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 정객들에게 한·일·청 삼국이 상호 협력할 것을 제안하며 동양 평화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침략 야욕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매국노인 을사오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귀국 후 암살을 결심하고 폭탄과 단도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1907년 3월 거사를 앞두고 계획이 발각되며 동지들이 체포되었습니다. 나철은 동지들의 고문을 덜기 위해 자수했고,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듬해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그는 이를 교훈 삼아 다른 방식으로 민족을 구원할 길을 찾기로 다짐했습니다.
대종교의 창립과 민족정신의 부활
1909년, 나철은 민족의 뿌리와 자주성을 되살리고자 단군교(檀君敎)를 창시했습니다. 단군교는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숭배하며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는 종교로, 나철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교리 체계를 정비했습니다. 1910년에는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고 5대 종지를 공포하며 교단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그는 대종교를 통해 잃어버린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만주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신채호, 김좌진, 홍범도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대종교의 신자가 되어 민족 독립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순교
대종교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제는 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1915년 대종교를 불법화했습니다. 이에 교단은 존폐의 위기에 놓였고, 나철은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는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가 단식을 통해 천신께 소명을 다짐했습니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나철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대종교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당부를 남기며 자신의 죽음을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여겼습니다.
나철의 업적과 유산
나철의 삶은 민족의 정신과 독립운동의 의지를 하나로 엮은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종교 창시자가 아닌,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 혁명가이자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습니다. 오늘날 대종교는 그의 뜻을 기리며 중광절(대종교 창립일)과 가경절(나철의 순교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나철 선생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단순히 독립운동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뿌리와 정체성을 되새기게 하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