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 선생은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그녀의 삶은 격동의 일제강점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중인 출신의 박원순의 딸로 태어난 박자혜 선생은 유년 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어린 나이에 궁궐로 들어가 아기나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1900년대 당시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의 근대 교육이 확산되고 있었지만, 박자혜 선생은 궁궐이라는 전통적 공간에서 10년간 유교적인 여성관을 기반으로 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운명은 1910년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 크게 변하게 됩니다. 일제가 발표한 ‘황실령 제34호’에 따라 많은 궁녀와 고용원이 해직되었고, 선생도 궁녀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숙명여학교에 입학해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입학하며 산파가 되기 위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제한적이었고, 산파는 비교적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여기서 간이 생리학, 산파학, 해부학 등을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한 박자혜 선생은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하게 됩니다.
총독부의원에서 간호부로 근무하던 박자혜 선생은 1919년 3.1 운동을 접하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필주 목사를 통해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회’를 조직했습니다. 박자혜 선생은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을 주도하며 만세운동에 동참하였고, 3월 10일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총독부의원장의 중재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신념에 병원을 그만두고 만주로 망명을 결심합니다. 그녀는 만주 봉천에서 석운 우응규의 도움을 받아 북경으로 이동, 1919년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했습니다.
북경에서의 생활 중 박자혜 선생은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과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은숙 여사의 중매로 이루어진 이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의미를 주었습니다. 1921년 첫아들 수범을 출산하며 가정을 꾸려갔으나, 신채호 선생의 독립운동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박자혜 선생은 다시 국내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산파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의열단 활동을 시작하면서 박자혜 선생도 후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 당시 선생은 그를 돌보고 안내하며 의열단의 활동에 힘을 보탰습니다.
박자혜 선생의 삶은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고난과 희생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양육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한편, 끊임없는 일제의 감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산파로서의 수입이 미미했기에 풀장사와 참외장사까지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927년 신채호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 그녀는 남편의 부재 속에서도 아들 수범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습니다.
그녀의 어려운 생활은 신문을 통해 알려졌고, 전국에서 후원금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아들에 대한 간섭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박자혜 선생은 1943년 홀로 셋방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고난과 희생, 그리고 조국을 위한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신채호 선생과의 사랑, 독립운동에의 참여, 자녀를 키우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은 그녀를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이름으로 남게 했습니다.
박자혜 선생의 삶은 단순히 신채호 선생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기록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