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3월 25일(음력 2월 18일), 평안북도 정주의 한 집안에서 이승훈은 태어났다. 아버지 이석주와 어머니 홍주 김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본관은 여주이며 아명은 승일, 본명은 인환이었다. 자는 승훈, 그리고 후에 그를 대표하는 호는 남강이다. 비록 그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
어린 시절과 학업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어린 이승훈은 할머니 송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869년, 가족은 정주읍에서 40여 리 떨어진 청정으로 이사했고, 그는 8세가 되던 해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은 그를 또다시 덮쳤다. 10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할머니마저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이승훈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그는 김이현의 유기점에서 무급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더 큰 유기공장을 운영하던 임일권의 상점으로 자리를 옮겨 독학으로 상업적 기술을 익혔다.
청년 시절과 사업가로서의 성장
15세가 되던 1878년, 이도제의 딸 이경강과 결혼하며 가정을 이루었다. 결혼 후 그는 유기 행상을 시작하며 평안도와 황해도를 오가며 사업을 확장했다. 그의 사업적 재능은 탁월했다. 1887년, 독립적으로 유기상점을 열고 유기공장을 세우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으로 공장과 상점이 폐허가 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자금을 마련해 공장을 재건했고, 사업은 안정 궤도에 올랐다. 이후 그는 운송업과 무역에도 손을 대며 점차 부를 축적했다.
국권 회복을 위한 첫걸음
사업의 성공과 안정 속에서 그는 사회적 관심을 키워갔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구독하며 시대의 흐름을 읽었고, 1906년 서우학회에 가입하며 국권 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무렵 그는 신민회라는 비밀결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안창호와 이동휘, 양기탁 등 동지들과 함께 활동하며 그는 교육과 실업을 통한 구국운동에 몰두했다.
오산학교 설립과 교육 운동
1907년, 그는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교육이야말로 민족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라 믿었던 그는 오산학교에서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학교 운영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백이행을 교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교감으로서 학교의 실질적인 운영을 책임졌다. 이와 함께 평양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애국 서적을 보급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05인 사건과 옥고
1911년, 이승훈은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결국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그는 깊은 신앙 체험을 하며 성경을 100번 이상 읽었고, 이는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며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3·1운동과 민족대표로서의 역할
1919년,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독립 의지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다시금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신념과 헌신은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말년과 유산
출옥 후에도 그는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오산학교와 교회를 통해 민족의식 고취와 신앙 전파에 힘썼고, 그의 삶 자체가 민족운동의 역사로 자리매김했다. 이승훈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닌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이승훈의 생애는 그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이를 극복한 의지와 헌신의 역사이다. 그는 우리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었으며,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